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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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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시 병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구부 병 선거구 개편으로 신설되어, 1963년 대구시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폐지된 대한민국의 옛 선거구이다. 1958년 달성군 일부가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선거구에 변화가 있었고,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재검표 결과가 번복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역대 국회의원으로는 이갑성, 이우줄, 임문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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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병 - [선거구 정보]에 관한 문서
선거구 정보
이름대구시 병
의회국회
큰 지도경상북도
연도1950
폐지1963
유형국회
이전 선거구대구부 병
달성군 (1958년 일부 편입)
이후 선거구대구시 정 (1958년 분리)
대구시 동구
달성군·고령군
의원 수1인

2. 역사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구부 병 선거구가 개편되면서 신설되었다.

1958년 1월, 달성군의 일부 지역이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이에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해당 지역 중 일부가 대구시 병 선거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남산동, 대명동, 봉덕동, 대봉동은 대구시 정 선거구로 분리되었다.

1963년 1월, 대구시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대구시 병에 해당하는 지역에 동구가 설치되었다. 또한 1958년에 달성군에서 편입되었던 지역이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이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구시 동구달성군·고령군 선거구로 각각 분리되면서 폐지되었다.

2. 1. 선거구 신설 (1950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구부 병 선거구가 개편되면서 신설되었다.

2. 2. 달성군 편입 (1958년)

1958년 1월, 달성군의 일부 지역이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이에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해당 지역 중 일부가 대구시 병 선거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남산동, 대명동, 봉덕동, 대봉동은 대구시 정 선거구로 분리되었다.

2. 3. 구제 실시 및 폐지 (1963년)

1963년 1월, 대구시에 구제가 실시되면서 대구시 병에 해당하는 지역에 동구가 설치되었다. 또한 1958년에 달성군에서 편입되었던 지역이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이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구시 동구달성군·고령군 선거구로 각각 분리되면서 폐지되었다.

3. 역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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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대 선거 결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이갑성 후보가 8,263표(23.14%)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우줄 후보는 5,141표(14.39%), 대한노동총연맹 소속 조용기 후보는 4,222표(11.82%), 조태영 후보는 4,056표(11.36%)를 득표했다. 백남채 후보는 2,779표(7.78%)를 얻었다.

이갑성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나, 이후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고 야당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선거에서의 당선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이우줄 후보가 51.6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자유당 이갑성 후보는 33.27%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하였다. 그 외 무소속 조태영 후보는 5.42%, 무소속 조병관 후보는 3.92%, 민주국민당 김재권 후보는 3.77%, 무소속 손원상 후보는 1.99%를 득표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독주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반감이 이우줄 후보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1958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재검표 결과가 번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초 개표 결과 자유당 이우줄 후보가 14,355표(40.34%)를 얻어 13,677표(38.44%)를 얻은 민주당 임문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재검표 결과 임문석 후보가 당선된 것으로 번복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에 대한 불신과 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4.19 혁명의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선거로,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민주당 임문석 후보가 53.61%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무소속 김학봉 후보는 15.46%, 사회대중당 김수한 후보는 15.03%를 득표하였고, 무소속 김영섭 후보는 12.80%, 무소속 이근하 후보는 3.08%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무소속 조주영 후보는 득표를 하지 못했다.

4. 1.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이갑성 후보가 8,263표(23.14%)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우줄 후보는 5,141표(14.39%), 대한노동총연맹 소속 조용기 후보는 4,222표(11.82%), 조태영 후보는 4,056표(11.36%)를 득표했다. 백남채 후보는 2,779표(7.78%)를 얻었다.

이갑성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나, 이후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고 야당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선거에서의 당선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4. 2.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54년)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이우줄 후보가 51.6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자유당 이갑성 후보는 33.27%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하였다. 그 외 무소속 조태영 후보는 5.42%, 무소속 조병관 후보는 3.92%, 민주국민당 김재권 후보는 3.77%, 무소속 손원상 후보는 1.99%를 득표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독주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반감이 이우줄 후보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4. 3. 제4대 국회의원 선거 (1958년)

1958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재검표 결과가 번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초 개표 결과 자유당 이우줄 후보가 14,355표(40.34%)를 얻어 13,677표(38.44%)를 얻은 민주당 임문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재검표 결과 임문석 후보가 당선된 것으로 번복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에 대한 불신과 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4.19 혁명의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4. 4.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선거로, 대구시 병 선거구에서는 민주당 임문석 후보가 53.61%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무소속 김학봉 후보는 15.46%, 사회대중당 김수한 후보는 15.03%를 득표하였고, 무소속 김영섭 후보는 12.80%, 무소속 이근하 후보는 3.08%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무소속 조주영 후보는 득표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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